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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엔화를 여전히 '안전자산'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달러당 163엔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더 무서운 건, 일본이 걸어온 그 길이 지금 한국의 미래와 겹쳐 보인다는 점입니다.

39년 만의 엔저, 왜 이렇게까지 무너진 걸까요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동일본 대지진처럼 일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엔화는 오히려 강세를 보였습니다. '유사시엔 엔화'라는 공식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1달러당 163엔을 넘어서며 39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고, 일부에서는 향후 180엔까지도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제가 관련 자료를 파고들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한 개념이 '마이너스 실질금리'였습니다. 실질금리(Real Interest Rate)란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수치인데, 쉽게 말해 예금에 돈을 맡겨도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면 실제론 손해를 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일본은 공식 금리를 사실상 제로에 묶어 놓은 상태에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자, 일본 국민과 투자자들이 엔화를 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이 자금이 해외 주식이나 디지털 자산으로 빠져나가면서 엔화 가치 하락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문제는 일본 중앙은행(BOJ)의 딜레마입니다. BOJ는 발행된 국채의 절반 가까이를 직접 매입하며 제로금리를 유지해 왔는데, 이를 '양적완화(QE, Quantitative Easing)'라고 합니다. 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국채 등 자산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입니다. 문제는 이 고리가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는 겁니다. 금리를 올리면 GDP 대비 260%를 넘는 국가부채에서 발생하는 이자 부담이 재정을 직격하고, 그렇다고 올리지 않으면 엔화 약세는 멈추지 않는 구조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일본 정부가 재정건전화 목표를 공식 지침에서 삭제하고 지출을 대폭 늘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발표 직후 일본 국채 시장에서 금리가 폭등했는데, 이는 채권 시장이 일본 정부의 신용도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출처: 일본은행(BOJ) 공식 사이트).
제가 이 흐름을 보면서 가장 섬뜩하게 느낀 건 기업 이야기입니다. 일본 대기업들은 한국 재벌과 달리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구조인 곳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투명해 보이지만, 전문 경영인들이 실패를 극도로 꺼리다 보니 과감한 R&D 투자나 혁신보다는 현금을 쌓아두는 경영을 선택했습니다. 30년간 기업 금고는 두둑해졌는데, 정작 직원들의 실질 임금은 제자리걸음이었다는 역설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 마이너스 실질금리 → 자본의 해외 유출 가속화
- BOJ의 양적완화 의존 → 금리 인상도, 동결도 불가능한 진퇴양난
- 재정건전화 목표 삭제 선언 → 채권시장 신뢰 붕괴, 국채 금리 폭등
- 기업 사내유보금 축적 → 임금 정체·내수 침체 악순환 30년 지속
한국은 정말 괜찮은 걸까요, 아니면 예고편을 보고 있는 걸까요
지금 원달러 환율이 비교적 안정적인 이유를 찾아보니, SK하이닉스를 포함한 반도체 수출 대기업들이 약 260억 달러 규모의 달러를 (ADR) 벌어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제 경험상 이런 '특정 산업 의존형 안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해당 산업이 흔들리는 순간 버팀목이 한꺼번에 무너지거든요. 지금의 환율 안정이 구조적 체질 개선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 이게 핵심입니다.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은 현재 주요 선진국 대비 낮은 편이지만, 지금의 재정 지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2040년에는 GDP 대비 8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여기에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민연금 수급자는 빠르게 늘어나는데, 세수는 반대로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이 '재정 역전' 문제를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에겐 이미 생생한 참고 사례가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이탈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1,560원대까지 치솟았던 기억 말입니다(출처: 한국은행 공식 사이트).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 사이에 흥미로운 차이점 하나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현금 결제 비중 이야기입니다. 2020년 일본 총무성 통계 기준으로 가계의 현금 결제 비중이 43.1%에 달했는데, 최근 조사에서는 신용카드 36.3%, 현금 35.3%로 처음으로 카드가 현금을 앞질렀습니다. 이 캐시리스(Cashless) 전환, 즉 현금 없는 사회로의 이동은 단순한 결제 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금 거래가 많을수록 매출 누락이나 이중 장부를 통한 탈세가 구조적으로 쉬워지고, 이는 세수 기반을 갉아먹습니다. 일본 국세청이 기습 세무조사를 대폭 강화하고 2030년까지 캐시리스 비중 65% 달성을 국가 목표로 내건 것도 이 맥락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한국에 대입해서 생각해봤습니다. 한국은 이미 카드 결제 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 세수 투명성은 일본보다 높은 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세수를 어디에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단발성 현금 지원이나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복지 공약이 재정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방식은 일본이 30년 동안 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2, 제3의 SK하이닉스를 키울 수 있는 기술력 있는 기업 발굴과 집중 지원, 그리고 국민연금 구조 개혁 같은 뼈를 깎는 작업이 더 이상 미뤄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
반도체 수출 호황이 만들어준 이 환율 안정 구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적 개혁의 골든타임은 위기가 오기 직전, 숨 돌릴 여유가 생겼을 때 단행해야 합니다. 위기가 터진 뒤에는 너무 늦습니다. 일본이 버블 붕괴 직후 과감한 구조 개혁 대신 돈 풀기로 버텼다가 30년을 허비한 게 바로 그 교훈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이 정확히 그 갈림길에 서 있다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엔화가 이렇게 떨어졌는데 일본 여행 지금 가면 이득인가요?
A. 단기 여행자 입장에서는 엔저가 구매력을 높여주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이득'이라고 단순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엔화가 이렇게까지 약해진 배경에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고, 그 여파는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행 계획이 있다면 지금이 나쁘지 않겠습니다.ㅎㅎ
Q. 한국 원화도 엔화처럼 폭락할 가능성이 있나요?
A. 당장 동일한 수준의 폭락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한국은 아직 국가부채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외환보유고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재정 지출이 방만하게 지속되고 국민연금 개혁이 지연된다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흔들리면서 원화가 급격히 약해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그 현실적인 전례입니다.
Q. 일본의 양적완화가 왜 실패했다고 보는 건가요?
A. 양적완화 자체가 나쁜 정책은 아닙니다. 문제는 일본이 이것을 30년 가까이 출구 전략 없이 지속하면서, 금리를 정상화하려 해도 이미 쌓인 국채 이자 부담 때문에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는 점입니다. 기업들은 이 과정에서 투자 대신 현금 비축을 택했고, 임금과 내수는 동반 침체됐습니다. 처방이 잘못된 게 아니라, 처방에만 의존하며 체질 개선을 포기한 게 문제였습니다.
Q. 일본의 캐시리스 전환이 한국에는 어떤 시사점이 있나요?
A. 한국은 이미 카드 결제 인프라가 세계 최상위권이라 세수 투명성 측면에서는 일본보다 유리한 구조입니다. 일본이 현금 거래 관행을 통한 탈세 문제로 세무당국이 기습 조사를 강화하는 상황과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다만 세수 기반이 탄탄하다고 해서 그 세금을 올바른 곳에 쓰고 있느냐는 별개 문제입니다. 결국 세수의 질만큼 지출의 질도 중요하다는 점, 이게 한국에 적용되는 핵심 시사점이라고 봅니다.
결론
제가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갑자기 찾아온 재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잘못된 선택들이 수십 년에 걸쳐 조용히 쌓인 결과입니다. 재정건전성(Fiscal Sustainability), 즉 국가가 수입 범위 안에서 지출을 통제하며 장기 재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포기하는 순간, 그 대가는 반드시 통화 가치 하락과 국민 생활 수준 하락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SK하이닉스가 벌어다 주는 달러로 숨 고르는 게 아니라, 그 타이밍을 활용해 연금 개혁과 전략 산업 육성, 재정 효율화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제2, 제3의 반도체 강자를 키울 수 있는 기술력 있는 기업을 발굴해 예산을 집중하고, 단발성 지원성 지출은 과감하게 줄여야 합니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